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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가을을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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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가을.


이렇게 날 찾아왔다. 아침도 모르고, 낮도 모르고, 저녁도 알지 못한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서 눈을 비비며 자판을 두드린다. 드넓은 세상에 나홀로 있는 듯. 고요한 세상 자판 소리만 요란하다.


좋아하는 책이 당근에 올라왔다. '네고불가'였지만, 네고를 걸었다. 안 된다며 단박에 거절한다. 네고불가를 걸기엔 책이 너무 비싸다.


"사지 말까?"


약간의 갈등이 일어났다.

 

"한 번 밖에 읽지 않았어요. 새책과 동일해요."


애걸한다. 난 분명 애걸로 해석했다. 알라딘에 거의 반값에 팔리고 있는 중고 도서를 캡쳐해 보내 주었다.

답장이 왔다.


"죄송해요. 남편이 네고하지 말래요. ㅠㅠ"


분명 착한 여자다. 순종적인 아내일까? 마음이 짠하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인 듯하다. 그냥 사기로 했다.


"그냥 살게요. 지금 가면 되나요?"


"ㅎㅎ넵 오세요."


"10분 안에 도착합니다."


가면서 생각하니 문득 내가 호구란 생각이 들었다. 바로 곁에 중고서점도 있는데 굳이 비싸게 왜 사려는지? 내 코도 석 잔데 애 그 집 사정을 걱정해야 되는 건지. 분명 난 호구가 맞다. 혼자 속으로 나를 자책하며 걸었다. 도착하니 30대 초반의 여성. 너무 젊어서 놀랐다. 현금 2만 원을 주고 서로 인사하고 돌아왔다.


순한 얼굴이 착한 문자와 같았다. 거짓 없는 얼굴, 순수한 모습에 놀랐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문득 또 이런 생각이 든다.


"왜? 내가 저 집을 걱정 해줘야 하지? 난 역시 호구인가?"


혹시 힘든 가정일지 모르니 도와준 셈 치자. 그렇게 스스로 기쁘게 생각하며 숨막히는 도로를 지나 작은 공원 숲길을 지났다. 곧 집에 도착한다. 곧장 걸어가면 집이면 아직 빛이 있동안 숲길을 걷고 싶어 공원쪽으로 돌았다.


가을이다. 아 벌써 가을이 왔구나.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낙엽이다. 주웠다. 가을을 주웠다.


곧 단풍에 피겠구나. 올해는 단풍이 유난히 아름다울 것 같다.


가을을 여기저기 뿌렸다.


방에 가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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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새벽그림자님에 의해 2023-10-07 18:57:07 블로그 포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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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 1페이지

워드프레쏘님의 댓글

음..그래도 네고불가 명시해 놨는데 네고 요청 하시는건 쫌..ㅎㅎ 저도 당근으로 물건 많이 파는데.. 기다리던 당근 알림 왔는데 네고 문의면 기운 빠지긴 하더라구요;;

adagio님의 댓글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때문에 10원때문에 1원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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